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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이야기(1) : 고대 육상,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by 슈기슈가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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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BC 3000-AD 220(한말))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우선, 초원로(Step route)에 대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초원길은 청동기문화가 전파된 길로써, 그 최초 지배자는 스키타이족이다. 또한 초원길에 있는 우랄지방과 알타이지방은 유명한 산금지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중국 고대 육상실크로드에 대한 설명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는 흉노족이다. 흉노족은 투르크족, 몽고족, 이란적 요소로 추정되는 민족이다. 실크로드 교역의 시초는 한무제가 기원전 139, 흉노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한 것이다. 이때 장건은 흉노족에 잡혀서 10년 간의 옥살이를 한 후 성과 없이 귀국하였으나, 서방에 대한 지식이 생겨남으로 인하여 이는 한나라의 동서교역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으로 기원전 121년 곽거병이 흉노 토벌을 위하여 다시 한 번 길을 나서게 된다. 그는 하서의 경영과 병행하여 중앙아시아 제국과 사절 교환을 실현하였으며, 서방 상인의 유치를 성공으로 이끌어 내었다. 또한 장군 이광리도 한혈마를 얻기 위하여 대원국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천산남북로가 더 많이 개척되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후 중국은 실크로드 지배권을 잠시 잃게 되는데 후한 명제 때 반포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며, 그의 부하였던 감영은 기원후 91년 로마와의 교통로를 열기 위하여 페르시아 만까지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주 교역품에는 중국은 주철기, 칠기, 비단 등을 서방에 수출하였으며, 서방은 직문가구, 일용품, 악기, 포토, 산호, 보석, 유리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또한 한무제로 인하여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이는 훗날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다음은 유럽 고대 실크로드 교류에 대한 설명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이 가장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진격하면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동서융합정책을 시행하면서 문화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정복지에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고, 그리스문화를 보급하였다는 것,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과의 혼인을 장려했다는 것 등이 있다. 주요 교역품은 우선 스키타이에서 그리스로 모피, 곡물, 노예, 귀금속이 수출되었고, 반대로 직물, 보석, 장식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이 스키타이로 수출되었다. 또한 로마는 산호, 보석, 유리 등을 중국으로 수출하였으며, 중국은 비단을 로마로 수출하였다.

2. 고대(BC 3000-AD 220(한말))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고대에는 주로 육상 실크로드가 번영하였기 때문에 해상실크로드에 대한 다양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해상 실크로드 발전의 기초를 닦은 의미가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선사시대에도 동서교류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물로 비너스상이 존재한다. 해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설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방해로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한나라 이후이다. 이전에 주나라부터 은나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로 견직기술이 조선이나 일본으로 전파된 기록뿐이며, 본격적으로 남해무역이 시작된 것은 진시황제의 영남 경략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인의 남해무역권을 탈취하고, 중국의 관할 하에 두려는 의도로 남월국을 침략하였다. 이로 인하여 월의 서각, 상아, 비취, 진주 등을 획득하였다는 기록에 역사서 사기에 남아있다. 물론 이때 획득품들은 월의 특산물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를 통하여 들어온 교역품이였다고 한다. 이후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 월국은 다시 부흥하였다. 한은 초기에 월국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우호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한무제가 두 차례의 남방경략을 시작하면서 남월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동남아와 인도와의 교통과 무역이 활발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은 남해무역권을 손에 쥔 후 역장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였다. 또한 121년 로마의 안토니우스의 사절이라 칭하는 자가 부남을 통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이 로마와 중국의 최초 해로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장인들은 국내로 진주, 벽유리, 기석 등을 가지고 왔고, 해외로 황금, 잡화, 견직물 등을 보내었다.

다음은 유럽의 고대 해상실크로드에 대한 설명이다. 초기 그리스인은 인도 방면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들의 지식은 현저하게 증가하게 된다. 동방원정 시기에 알렉산더의 친구였던 네아르코스가 인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인더스 강 하구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항해한 것이 최초의 인도양 횡단 및 항해의 시작이였다. 로마제국의 성립 또한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인도통상을 촉진시켰다.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병합하고,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마케도니아를 정벌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지중해를 재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 중개무역이 아닌 인도와의 직접 통상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된다. 인도에서 로마까지 해로는 인도양, 홍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에서 집결하여 로마 본토나 지중해 일대로 화물이 운반되었다. 인도의 주요 화물 집산지는 남인도의 무지리스, 인도의 바르바리콘, 바리가자 등이 대표적이다. 주요 교역품에는 인도는 약품, 향료, 호초, 벽유리 등을 수출하였으며, 유럽은 포도주, 산호 등을 수출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로 교역이 활발해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히팔로가 계절풍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가 발견한 계절풍의 변화를 항해에 적용하여 아테네부터 홍해, 인도양에 이르는 직항로를 개척하는 데에 기여했다. 동서 교류의 교류담은 특히 '에리스라해 안내기'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에는 인도 이서의 항로나 제항구의 무역품, 체험담, 목격담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으며 중국의 초기 영문이름인 시나의 기원이 기록되어있다.

인도와 동남아의 교류는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기 인도의 이민자는 주로 모험가였다. 이들은 동남아에 인도의 언어, 문자, 종교(브라만교)를 전파하였다. 또한 동남아의 향료는 당시 인도상인에게 매력적인 상품이었다고 한다.

고대 해양 실크로드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서양의 직접적인 교류가 아니라 중개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양의 세력이 교역에 더 적극적이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본격적인 해양 실크로드의 태동기였으며, 점차 늘어나는 교역량을 충당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또한 육로로 운송이 힘든 물품의 거래를 가능하게 하여 이후 해상 실크로드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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