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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이야기(2) : 삼국의 분립과 투쟁, 남북조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by 슈기슈가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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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의 분립과 투쟁 과정

후한 말, 어린 황제의 즉위로 조정이 혼탁해지면서 황건적의 난(184년)을 시작으로 한나라가 멸망한다. 그 후 조조와 유비, 손권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시기(3세기 초)부터 서진의 통일(3세기 후반)시기까지를 중국 역사상의 '삼국시대'라 한다. 조조의 위나라는 삼국 중 가장 강대국이었다. 위나라는 9품 중정제, 둔전제, 호조제 등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손권의 오나라는 남경을 도읍으로 하였고, 강남에 건국한 최초의 한인 국가였다. 촉은 양자강 상류를 지배하는 유비와 제갈량이 지배하였다.

삼국시대의 경제는 후한 말에 경제가 악화되어 가뭄과 전염병의 창궐, 화폐가치의 하락 등이 악재가 겹쳤기 때문에 자급자족의 경제로의 후퇴가 초래되었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이 남편을 먹었다"라는 식인 풍습이 널리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정부 스스로가 장원 경제를 모방한 둔전제도를 주장하게 되었다. 둔전제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거두어서 정부가 관리하는 영지로 만들고, 파산한 빈민들을 모아 그 땅을 집단 농작으로 경작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둔전제가 성공하면서 조조는 경제적으로 주변의 경쟁자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삼국시대에 일어났던 가장 큰 전투를 몇가지 뽑아보자면 백마대전, 관도대전, 적벽대전을 들 수 있다. 이 세 전투는 모두 조조의 승리로 끝이 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관도대전은 불리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군이 승리하며 하북 지방을 차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적벽대전은 위, , 오로 중국이 삼분할된 후에 발생한 남북간의 최초대전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2.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위나라 후기,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겪는 틈을 타서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하고, 사마이의 손자인 사마염이 진나라(서진)를 건국한다. 그러나 봉건제의 역효과로 발생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하고 그 후 동진이 건국된다. 서진의 멸망 후, 한족과 5개의 이민족이 세운 16개의 국가가 북부에 난립햇다. 이 시기를 '오호 십육국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북위가 439년에 북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면서 오호 십육국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 시대(386~589)로 넘어가게 된다. 남북조 시대는 북위의 통일부터 수의 통일까지를 일컫는다. 화북의 북위, 북제, 북주, 수나라를 북조라고 하며, 북조에 밀려 장강 쪽으로 이동한 송, 제, 양, 진의 한족 국가를 남조라고 했다.

남북조 시대의 경제는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기 위하여 균전제를 실시하고, 9품 중정제(구품관인법)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실시는 오히려 호족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역효과만 낳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조 사회는 문벌 귀족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학살을 피해 화남으로 이동한 한족들에 의해 양쯔강 이남 지역인 강남의 개발이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비롯된 남조와 북조의 문화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귀족 중심이라는 특징이 있다. 두 번째, 이민족의 문화와 한족의 문화가 융합되었다. 세 번째, 청담사상과 불교가 발달했다. 특히 이 시대 불교의 발달로 윈간, 룽먼, 둔황 석굴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문화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북조는 유목민족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효문제는 선비족 성씨를 한족성씨로 바꾸고 남조를 모방한 귀족제도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소박하고 강건한 문화와 유교문화가 결합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남조는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와 현실 도피적인 노장사상 즉, 청담사상이 결합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형성된 6조 문화는 강남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호족들이 강남으로 이동을 하고, 강남으로 이동한 지식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에서는 4.6변려체가 유행하여 도연명이 활약하였고, 예술 부분에서는 화가 고개지와 시인이자 서예가인 왕희지가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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